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온지 긴모치 (문단 편집) === 정치 초기 === 정치가로서의 경력은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한 [[이토 히로부미]]의 수행에서 시작된다. 유럽에서 이토의 지우를 얻은 사이온지는, 1900년 입헌정우회 개양에 참가해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. 그 후 [[다이쇼 천황]] 즉위시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. 사이온지의 사상은 프랑스에서 배운 자유주의(liberal)을 자칭하여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.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 탓인지 친유럽적인 면을 보여 군부 등에서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람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. 그에게 정치력이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 사후의 일본에서 사이온지만큼의 정치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. 궁중 재계와의 인척관계를 배경으로, 그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, 군부의 조정역을 맡아 일본 정계를 이끌었다. 또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를 개정하려 하는 등 쇼와 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와는 거리를 둔 언행을 간간히 보이며 군부의 세력 확대에 저항했지만, 전쟁을 막아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. 첫 임기 때 [[대한제국]]의 국권 침탈에 많이 일조했다. 통감체제 하로 두는 [[한일신협약]]을 날인했고, 그의 상관 [[이토 히로부미]]와 함께 군대를 완전히 해산시킨 장본인이다. 프랑스에서 배운 자유민권 사상은 어디 갔냐 싶지만, 당대 프랑스가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악랄함으로 유명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런 킨모치의 제국주의적인 면모 또한 그대로 배워왔다고 볼 수 있다. 당대 제국주의 국가의 사상가와 정치인들 중에서 이런 모순을 지적하면서 반대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비정상 취급이나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자.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수탈한 것에 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